행정기관에 조사·확인·시정조치를 요구하면 자주 돌아오는 말이 있다.
: “그 사항은 행정청의 재량입니다.”
‘재량’이라는 말은 매우 강하다.
민원인은 이 말을 듣는 순간 행정기관이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절대적인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. 담당 공무원의 전문적 판단에 민원인이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.
그러나 재량은 결론이 아니다.
재량이 인정된다고 해도 행정기관은 어떤 사실을 조사했는지, 어떤 처리방법을 검토했는지, 관련된 공익과 사익을 어떻게 비교했는지, 왜 특정한 조치를 하지 않기로 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.
아무것도 검토하지 않은 채 ‘재량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직무방치가 적법한 재량행사로 바뀌지는 않는다.
□ 우수 배수시설을 신고했지만, 행정기관은 조사하지 않았다
부동산 하측 토지 소유자는 비가 내릴 때마다 석축 사이를 통하여 물이 흘러 내려와 자신의 토지가 침수된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.
상측 토지의 현 소유자는 이 문제를 확인하기 위하여 ○○군청에 우수 배수시설과 석축, 우수 배출현상에 대한 현장확인과 조사를 요청하였다.
그러나 ○○군청은 민원인에게 사실상 다음 사항을 먼저 밝히라고 요구하였다.
– 우수 배수시설을 누가 설치했는가,
– 언제 설치했는가,
– 해당 시설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민원인이 입증할 수 있는가.
민원인은 행정기관의 안내를 믿고 직접 배수시험까지 실시하였다. 물을 흘려보내자 실제로 석축 방향을 통하여 하측으로 물이 배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.
민원인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○○군청에 다시 조사를 요구하였다.
그런데 ○○군청의 해당 발언에 대한 적정성이 행정심판에서 문제 되자, ○○군청은 종전의 유선통화가 공식적인 행정답변이나 처분이 아니라 단순한 안내와 설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.
문제는 그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.
○○군청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확인을 실시하지 않았다.
– 현장 육안확인
– 배수시험 입회
– 건축허가·신고자료와 현황 비교
– 항공사진 대조
– 관계인 진술 확인
– 건축·개발행위 관련 부서의 합동검토
행정기관의 유선안내가 공식적인 처리기준이었다면, 그 안내를 믿고 행동한 민원인의 신뢰와 후속조치를 검토해야 한다.
반대로 아무런 공식적 의미가 없는 안내였다면, 그 안내에서 제시한 ‘설치자·설치연도·위법성의 선행 입증’ 역시 현재까지 조사하지 않은 근거가 될 수 없다.
결국 이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순환구조가 형성되었다.
: 행정기관이 조사하지 않는다.
→ 설치자와 설치연도가 밝혀지지 않는다.
→ 설치자와 설치연도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조사하지 않는다.
행정기관이 조사하지 않아 남아 있는 불확실성을 다시 민원인의 입증 부족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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